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발린의 혼사 권유에 대한 대답을 속으로 생각하며 대장간의 모루 앞에서 소린은 철을 두드렸다. 점점 결혼하라는 성화가 드세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혼처를 거절하였다.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번영한 과거의 모습을 잃어버린 난쟁이들은 이제서야 겨우 청색산맥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야 살만한 티가 나 한숨을 돌리고 다음 목표를 향해 준비를 해야만 했다. 가정을 꾸릴 수도 없고 꾸릴 생각도 없었다. 그는 에레보르를 제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용과 싸워야 했고 자신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는 그저 소문으로 들리던 왕족과 결혼한 미망인 하나만 만드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소린은 벼리던 칼을 담금질 하였다. 시뻘겋게 달궈진 철이 물에 닿으며 비명을 지르며 차게 죽어갔다. 일을 마친 칼을 옆으로 던져놓고 다음 일감을 다시 아궁이에 집어넣고 붉게 달구었다. 그리고 다시 꺼내어 두들겼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 비슷한 것은 있었지.
그는 먼 에레보르의 일을 회상했다. 머크우드의 엘프왕이 찾아왔다. 왕이 몸소 왔으나 사절단은 검소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찰 겸 온 것이 분명했지만 그때 자신은 멋도 모르고 진정 에레보르에 존경을 표하러 온 것 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에 그와 소린은 외로운 산 뒷 편 비탈이나 머크우드의 어둠이 채 스며들지 않은 끄트머리에서 그와 밀회를 했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적도 없고 남녀의 만남처럼 미래를 약조하지도 않았다. 상대는 요정이었다. 끝없는 생을 가진 찰나의 찰나같은 순간에 요정왕은 짧은 유희를 하였겠지, 젊고 어린 드워프와. 그래도 그 찰나 동안 자신은 진심이었다. 상대의 진심은 모르건만 제 마음 만은 진실되었다고 곱씹었다. 수 년 전 까지만 하여도 그를 떠올리며 끓는 분을 삭히느라 애를 먹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스마우그의 사건과 그의 밀회에 대한 것을 분리할 수 있었다. 상대가 어찌되었거나, 사랑은 사랑이었지. 이제 사랑이고 뭐고 너무 나이를 먹어버렸다. 사랑 이전에 책임이 막중했다.
그는 앞으로의 일을 가늠해 보았다. 그 동안 일하여 모은 돈은 제법 되어 노잣돈을 어느 정도 충당 할 만 하게 되었다. 예상치 못하게 마법사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날이 따뜻해지면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겠지. 소린은 묵묵히 쇠를 두들겼다.
양 손이 묶이고 무기를 모두 빼앗긴 채 낮인지 밤인지 알 수도 없는 검은 숲을 오랜 시간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높은 성벽과 횃불들이 보였다. 이제 곧 그를 만나겠지. 소린은 제 기분을 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참으로 요정답게, 스란두일은 그날로부터 단 한 치도 변함이 없었다. 소린은 한동안 연기를 해야 했다. 자신은 식은 분노에 불을 붙이고 스란두일은 그럴싸하게 자신을 경멸했다. 그렇게 적당히 되었다. 나는 옥으로 갔고, 놀랍게도 식사를 대접받았다. 요정의 예절인가 아니면 옛 정인도 뭣도 아닌 놈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 또는 비꼼인가. 소린은 작게 코웃음을 치고 어두운 방 안에서 식사를 했다.
자정이 훨씬 넘었으리라 짐작되는 새벽에 문이 열리고 마냥 간수로는 보이지 않는 요정 둘이 와 소린의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로 데려갔다. 어딜지는 쉬이 예상이 되었으나 사건 자체는 참으로 예상 외였다. 밀회는 그렇게 길지도 않았고 가물가물할 정도 오래 전의 일이었는데 굳이 자신을 이리 몰래 불러올 정도로 그가 감상적인 인물이던가 생각하며 소린은 저 혼자 피식 피식 실소를 흘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두건이 벗겨졌다. 왕의 침소였다.
“두고 나가.”
스란두일은 손끝으로 아랫것들을 내보냈다. 그리고는 느리고 나붓나붓한 걸음으로 다가와 소린의 손목에 묶인 줄을 칼끝으로 끊어냈다.
소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스란두일의 검지와 중지가 애매하게 그의 손목을 스쳤다.
“인사는 아까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소린이 올려다 본 스란두일의 눈빛은 아무 감정도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발끝에 걸린 돌을 보는 시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변함이 없는 것 일까? 소린은 엘프의 표정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지.”
엘프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이번엔 푸석하고 빛 바랜 머리카락을 넘겼다. 말을 하기도 귀찮은가, 아니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 일까?
“무슨 용건이지?”
“옛날과 같은 용건.”
소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양 손바닥을 그에게 내보였을 뿐. 스란두일의 손이 다시 그에게 닿을 찰나에 다시 소린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신변을 보장한다면.”
“그러하지.”
스란두일은 소린의 몸을 나꿔채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섹스마저도 그때와 다름이 없었다. 스란두일은 찬 기운이 풀풀 풍기는 손짓으로 무성의하게 소린의 옷을 벗겨내고 제 옷도 벗고선 몰아치듯이 애무했다. 소린은 헝겊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신음을 참다, 못내 흘리다, 결국 그의 몸 위에 올라타 눈물을 흘리며 제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긴 손가락으로 살을 쥐어 주무르고 다리를 벌리게 하고 몰아부쳤다. 소린은 수 번의 절정을 맞았다. 스란두일도 몇차례 사정을 했지만 과연 그것이 만족의 증거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소린은 새벽에 남몰래 다시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시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뒤로도 그런 밀회 아닌 밀회가 이루어졌다. 잡혀있는 포로이자 다른 일행의 신변을 저울질하는 스란두일과 소린의 줄다리기 였다. 빈도는 들쑥날쑥 했다. 스란두일은 제 내킬 때 불러들여 정사를 치뤘다. 옥에 있는 동료들을 빌미로 수치스러운 짓을 시키기도 하고, 몸이 간신히 버텨낼만큼 밀어붙이기도 했다. 소린은 감내했다. 이미 오랫동안 떠돌이 민족의 우두머리로서 치룬 수많은 수치와 굴욕에 그는 익숙해져 있었고, 그렇다고 그것에 꺾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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